한국 번역회사 생존기 16 - [SYSTEM] 출근 보너스: 스트레스 수치를 +n 얻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대원 여러분. 최근 회사 돈으로 건강검진을 했다가 스트레스 수치가 위험도를 찍은 것을 보고 현타를 느끼는 비욘드입니다.

입사 전 면접 때 주고받았던 질문과 답변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군요.

"스트레스 관리를 어떻게 하냐"는 질문에 "스트레스를 잘 받지 않고 받더라도 취미 활동으로 관리합니다"라고 대답했습지요. 그런데 검진 결과가 스트레스 수치 위험이라니 하하하. 거짓말한 기분이 드네요.

하지만 사람이 감당 가능한 스트레스 한도가 있지 않습니까? 이건 감당 불가능한 스트레스를 준 회사 탓이지요.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눈썹과 속눈썹이 땀이나 이물질이 눈에 들어가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지만, 폭포 아래 눈을 뜨고 서 있으면 눈에 물이 들어가다 못해 눈알에 물싸대기 맞는게 당연하듯이 스트레스 저항력에도 당연히 한계가 있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지만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한편, 다른 프로젝트를 맡고 있는 PM의 스트레스 지수는 그렇게까지 높지 않더라고요. 정상치를 한참 벗어나긴 했어도... 저도 그 PM 분도 빠른 회사 탈출을 기원합니다.

고갱님이 이렇게 스트레스를 주는 요인은 대개 정해져 있는데, 그중에서 고갱님이 번역회사를 도깨비 방망이로 생각할 때가 단연 1등입니다. 무슨 뚝딱하고 번역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 납기일을 말도 안되게 제시하고 막무가내로 타협도 해주지 않는 식으로 PM과 LL을 개롭히지요. 게임 개발 일정이 타이트해서 안된다면서요. 즉, 내가 바쁘니 너희가 맞춰라라는 것이예요. 갑이면 다야? 네. 다니까 울면서 야근해서라도 맞춥니다.

영어, 일본어 외에도 다른 언어를 서비스하는 게임의 모든 번역을 저희에게 맡겨주신 고갱님. PM이 아이고 감사합니다하고 일을 받기는 했는데 엥 날짜가 잘못된 것 같아요 고갱님! 4일 안에 달라고요? 농담도ㅎㅎㅎㅎ 근데 농담 아니고 4일 안에 달래요.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는 가짓수의 언어는 한국어->영어->그외 언어로 중역을 하기 때문에, 소스가 될 영어가 중요하니 바쁜 일정이지만 영어를 에디팅, 프루프리딩, 마지막으로 LL 자체 검수까지 3일 이상 소요됩니다.

그렇게 받아온 번역물을 고갱님께 제출하며 '이렇게 번역해도 될지요?'라고 컨펌을 받지요. 그리고 나서 고갱님 컨펌된 영어를 소스 삼아 다국어를 번역해달라고 하고, 다국어 현지팀이 한 번, LL이 자체적으로 한 번 퀄리티 검사를 한 다음, 파일을 정리해서 고갱님께 납품합니다.

대개 이 과정에 2-3주가 소요됩니다.

그런데 영어 번역을 4일 안에 내놓으라는 것도 아니고 다국어 번역을 4일 안에 내놓으라니!

영어 번역본을 고갱님이 컨펌하고 다국어 번역을 맡기면 시간이 소요되니 컨펌 안하고 바로 다국어 번역을 들어가라고 하셨어요. 영어 소스가 잘못됐다면(의도나 '느낌'과 다를 때) 나중에 다시 고치면 된다고 하면서요.

불가능한 일정이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고갱님은 노빠꾸입니다. 작업물은 예스빠꾸겠지만요.

결국 에디팅도 프루프리딩도 후다닥 끝냈으며, 고객 컨펌을 스킵하느라 그놈의 '느낌'대로 번역이 됐는지 확인도 못하고, 얼른 다국어 번역을 거쳐서 - 시차 때문에 다국어 번역이 제대로 됐는지 확인할 시간도 없어서 엉망진창 - 고갱님이 제시한 나흘이라는 일정 안에 무사히 납품을 했습니다. 현지화 수준 때문에 유저의 게임 신뢰도가 하락해도 저희는 몰라요 ㅇㅅㅇㅎㅎㅎ 저희는 경고했다 분명.

Update: 역시나 급하게 먹은 밥이 체한다고 자세히 체크하지 못한 다국어 번역물에 일부 에러가 있었고 고갱님 컨펌을 거치지 않은 영어 번역문이 마음에 안 드셔서 결국 예스빠꾸하셨고요, 다시 바뀐 영문 소스에 맞게 다국어도 싹싹 다 고쳐서 제출했습니다.

근데 그걸 다음 게임 업데이트 때 반영하는게 아니라 일정대로 이번 업데이트 때 반영한대요. 조금 더 느긋하게 제출해도 됐던 것이예요! 그럴거면 왜 그렇게 일정을 타이트하게 준거죠? 사디스트이신가요 고갱님?ㅠㅠㅠㅠ 일주일도 결코 느긋한 일정은 아니지만(미친 일정인 것은 마찬가지) 그럼 소스 컨펌이라도 할 수 있었잖아요. 고갱님? 고갱님??? 이러고 따질 수 없어... 그저 웃지요. 갑님인데다가 따져봤자 분명 또 "미안해요 저희가 바빠서~ 알죠? 저희 업계 원래 이런거^^" 하실 것임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예요. 퇴근하고 저의 스트레스 관리용 취미 활동 중 하나인 샌드백 패기나 하러 가야겠습니다. 멘탈을 잃은만큼 주먹왕이라도 될 것이예요.

대원님들도 혹시 비슷한 일을 겪고 계시다면... 화이팅! 멘탈을 잘 관리합시다. 아니면 근짱이라도 됩시다.

그럼 다음 생존기에서 보아요.
beyond 번역가 beyond · 2019-11-27 14:56 · 조회 226
전체 3

  • 2019-11-28 01:23

    갸아아악.. 역시 회사는 만병의 근원이군요ㅠㅠ
    beyond님과 동료 PM분 둘 다 정상 수치를 뛰어넘는 스트레스를 받고 계시다니 마음이 아픕니다ㅠㅠ
    그나저나 그 고갱님 진짜 글만 읽었는데도 혈압 상승입니다(..) 아무리 갑이라고 해도 상도덕은 지켜야 하는 것 아닙니까..
    고갱'님'이 아니라 고갱'놈'이네요, 놈, 놈, 놈..!!
    beyond님께서 발랄하게 글을 쓰셨지만 얼마나 시달리고 계신지가 느껴져서 뭔가 맘이 아프네요ㅠㅠ
    맛있는 음식과 따뜻한 차 한잔으로 지친 마음 달래시길 바라며, 아무쪼록 건강 유의하세요..!!


  • 2019-11-28 13:01

    스트레스 정말 만병의 근원입니다. 저는 2년차 되면서 위장이 박살나서. ㅠ_ㅠ 건강이 쵝오입니다. 아프지 마세요...


  • 2019-11-28 13:05

    이 글을 읽으며 마치 제가 회사를 다니는 것 같은 수준의 스트레스를 느꼈습니다. 힘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