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번역가의 생존 후기 아닌 후기

다른 분들이 포럼에 생존 후기 써주시는 게 넘 재밌어서 저도 한번 써보려고 합니다

제목이 후기 아닌 후기인 것은 아직 뭔가 제대로 매듭지은 게 없는 것 같아서요 여전히 번데기입니다ㅠㅠ

 

일단 저는 9to6 사무직 직장 재직 중이고, 한산번에 가입한 것은 작년 8월이었어요.

회사에서는 이메일 응답만 하고 번역 일은 근무 외 시간이나 주말에만 하고 있습니다.

 

단순 퇴사, 이직으로는 회사원이 가지고 있는 불안, 우울 등이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거 같았고,

회사원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 한산번까지 왔습니다.

가입 및 이력서 작성은 한 달만에 끝마쳤는데, 막상 이력서를 돌리려니까 그때 너무너무 떨리는 거예요.

이력서 한 장 돌리는데 시간도 너무 오래 걸리고 진빠지고... 그러다가 50장도 못 돌리고 그대로 잠수를 탔습니다..;

그러다가 올해 1월부터 퇴사하고 싶은 마음이 마구마구 솟구치면서 다시 이력서 돌리기를 시작했습니다.

영어 공부도 해야 되고 이력서도 돌려야 해서 이때는 아마 새벽에 일어나서 이력서 돌리고 출근하고 퇴근하고 카페 가서 성문기초를 봤던 거 같아요.

 

그렇게 성문을 3회독을 하고, 이력서를 300개쯤 돌렸을 쯤에 첫 호떡이 들어왔던 거 같아요.

NDA도 안 쓰고 샘테도 없이 제게 A4 한 장짜리 프루프리딩을 휙 던져 주었습니다. 그걸 10번은 보고 넘긴 거 같아요.

잘 받았다는 연락도 없다가 그 달 말에 인보이스를 쓰니까 다음 달에 조용히 페이팔 입금이 되어 있더라고요.

 

두 번째 호떡은 첫 번째 일이랑 비슷한 시기에 들어왔습니다.

시차를 잘못 알고 오 여유 있네~ 하면서 받았다가 마감 몇 시간 전에 시차 확인하고 부랴부랴 넘겼습니다;

덕분에 항상 시차를 확인하는 습관이 들었어요. 머리가 차갑게 식는 그 느낌을 또 경험하고 싶지 않습니다ㅠㅠ

이것도 별 문제 없이 입금까지 끝났습니다.

 

세 번째 작업은 MTPE를 진행했어요. 대규모 MTPE 파일 중에서 일부를 진행했는데,

번역기가 너무 일을 못하고, 웹툴이 너무 불편하고, 제 절망스러운 영어 능력 콜라보로... 거의 한 달 정도 그냥 주말이고 평일이고 가리지 않고

기상-출근-퇴근-번역-취침, 기상-번역-밥-번역-잠 거의 그런 식으로 일을 했습니다.

이때 정말 너무 퇴사하고 싶었고 노트북을 정말 사고 싶었는데... 무사히(?) 시기를 넘겼습니다.

 

네 번째 작업은 이전에 같이 작업했던 회사에서 연락이 와서 진행했습니다.

딱 목요일에 연락와서 금요일부터 작업 가능한지 물어보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어요. 사실 평일 호떡은 어쩔 수 없이 거절한 경우도 몇 번 있었거든요.

처음으로 트라도스 사용해서 진행했고, 패키지 파일 만들어서 납품하는 게 너무너무 떨렸지만 문제 없이 잘 마무리되었습니다ㅠㅠ

 

다섯 번째 작업은 오늘 진행했네요. 진짜 호떡 두개쯤 사먹을 금액의 작업물이 들어와서 간단하게 보고 납품했습니다.

납품하고 심장 떨려서 하루 이틀은 공부고 뭐고 집중 못하는 건 언제쯤 괜찮아질지 모르겠어요.

 

지금까지 이력서는 500개 정도 돌렸고, 계약한 회사는 5~6군데 되는 것 같아요.

나름 엑셀에 기록한다고 하는데 기록을 게을리 했더니 조금 헷갈리네요...

 

요즘엔 번역 일이 없다면 평일 및 주말 오전에 공부하고, 매 주말에 이력서를 20개씩 넣고 있습니다.

이력서 넣는 양이나 공부 시간의 절대값이 많이 부족하다는 건 아는데 저를 더 몰아붙이면 너무 우울하더라고요...ㅠㅠㅠ

공부는 임윤님께서 블로그에 작성해 주신 공부법으로 계속 하고 있어요. 물론 이런 저런 이유로 매일 매일 꾸준히 보는 것은 실패할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글로 써놓으니 자괴감 들고 괴롭네요.. 고등학교 영어 교과서 한번 끝까지 봤고 이번엔 괜찮아 보이는 독해 교재 하나 구해서 번역해보고 달달달 보고 있습니다. 영어 실력이 좋아진 건 모르겠는데 암기력이 조금 나아진 것 같아요..!

 

오늘도 퇴사하고 싶은 마음이 진짜 거짓말 안하고 10번은 왔다갔다 했지만 (속으로 울면서) 참고 있습니다. 마치 쇼생크 탈출에서 숟가락으로 교도소 벽을 파는 것처럼요.. 하루라도 빨리 탈출하고 싶지만 번역으로 월급만큼 돈벌이가 될 거라는 걸 가족들도 안 믿고 스스로도 '과연 내가?'라는 마음이 있어서 아직까지 망설이게 되네요. 언젠가 일거리가 안정적으로 들어오거나, 이 직업에 스스로 믿음이 생긴다면, 미련 없이 번역 땅굴(?)을 타고 회사를 유유히 탈출하고야 말 것입니다ㅠ_ㅠ 존버는 승리하니까요!!
번역가 으엇 으엇 · 2021-06-08 20:50 · 조회 461
전체 4

  • 2021-06-09 01:13

    저만 중도 탈주했던 게 아니었군요 ㅋㅋㅋㅋ 회사에서 빨아먹을 수 있는 건 다 빨아먹읍시다 최대한 넉넉하게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능력에 따라 천지차이지만 조급하게 마음먹을수록 탈주 가능성만 높아지는 것 같아요 (...) 저는 게임으로 따지면 이제 튜토리얼 슬라임 잡고 있는 단계라서 더 그런 거 같네요. 번역가님은 일을 끝마치고 별 클레임 없이 입금을 수확하시고 있다는 점에서 엄청 잘하고 계신 거 같아요. 힘내세요! 공부도 성실히 하시고 실력이 있으시니 이력서 갯수가 늘어나신다면 번역가로 자립하실 거예요!


  • 2021-06-08 21:01

    저는 병행이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고 퇴근하고도 계속 일하니까 사는게 사는 것 같지 않더라구요ㅠㅠ 직장 본업을 병행하고 싶어도 더이상 못버티겠는것도 있었고..


    • 2021-06-08 21:09

      맞아요 퇴근하면 또 다른 출근의 시작이니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죠ㅠㅠㅠ 어떤 느낌인지 너무너무 공감합니다


  • 2021-06-17 19:58

    "새벽에 일어나서 이력서 돌리고 출근하고 퇴근하고 카페 가서 성문기초를 봤다"는 대목에서 그만 자동낙하하는 턱을 붙잡는 데 실패했읍니다..세상에 그런 부지런함과 정신력이라니... 으엇님은 무엇을 해도 성공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