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보니 번역가 일기 12월 결산 / 질문과 답변



숫자만 있으니까 너무 재미없는 것 같지만 실제 일은 더 재미없습니다. 제가 항상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일이 재미있으면 본인이 하지 왜 남한테 맡깁니까. 저는 그 남일 뿐이지요.
별 의미는 없는 것 같지만 통계를 내보겠습니다. 사실 저도 상당히 흥미로운 결과였습니다.

총 단어 수: 68,239단어
총 수입: 3,178,359원
총 노동시간: 52시간 (일 8시간 환산 시 6.5일(...))
시간당 단어 수: 1,312단어
시간당 노동값: 61,122원

그 외에 (데이터가 있으니) 분야별로 어떤 게 많이 들어왔나 통계를 내볼까 하였으나
기본적인 자료해석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기준을 단순히 프로젝트 수로 내면 안 되고.... 가중치를 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단어수를 기준으로 할지 수입을 기준으로 할지 생각하다 보니 머리 아파서 관뒀습니다. 대강 보니 비즈니스와 게임 비중이 좀 높군요.
총 번역노동시간을 보고 저도 어이가 없었는데 한국산업번역교육 이사님도 어이가 없으셨나 봅니다. 인간적으로 번역가라면 다음 달에는 10일은 일하라고요.... 네 맞아요 1월에도 어쩌다보니 번역가 일기 할 겁니다.

사실 프리랜서의 수입이란 생각보다 적지도 불안정하지도 않습니다. 이 점을 보여드리려면 제 생각에 적어도 3개월(1분기) 정도는 진행해 봐야 할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2월에는 본격적으로 새 교재 집필에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어쨌든 '어쩌다보니 번역가 일기'를 진행하며 받았던 질문을 다시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Q) 이곳은 주 52시간 일하는 나라다. 월 52시간 일해놓고 트위터에서 맨날 노동자의 단결을 외치고 노동의 고통에 몸부림쳤냐?
대강 짐작하시겠지만 제 주요 노동은 번역이 아니고 이력서와 번역 첨삭, 파일 여는 법에 대한 교재 작성입니다.
사실 노동환경이나 정신적 데미지를 고려하면 전 번역노동이 가장 좋습니다. 그래도 시작과 끝이 명확하고 데드라인도 있고 제가 하루에 얼마나 번역할 수 있는지 알고 있어서 절대 무리해서 일을 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파일 여는 법 가르치고 있냐? 저도 모르겠어요. 사람이 원래 뜻대로 못 살잖아요.
물리적 시간과 정신적 고통을 고려하면 이력서 첨삭의 비중이 아주 큽니다. 왜 테솔이 있고 영문과를 졸업했고 미국 대학을 졸업했고 통대를 나왔는데도 관사를 못 쓰고, 단복수를 구분하지 못하고, 고유명사와 일반명사를 구분해 작성하지 못하시는지...
저는 새 이력서 파일을 열 때마다 교회도 안 다니면서 열심히 기도합니다.
'관사가 있게 하소서, 단복수가 구분되게 하소서, 대소문자가 구분되게 하소서'. 물론 제 소원이 다 이루어진 적은 12월에는 2번쯤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제 노동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방법을 압니다. 이력서 써오시면 제가 대강 말만 되게 고치고 70년 간 영어를 사용해 오신 원어민 첨삭자 분께 돈 좀 더 드리고 넘기면 됩니다. 그런데 그러면..... 관사 단복수 대소문자 못 쓰는 분들이 영원히 그 상태로 살아가시게 됩니다. 그래서 잘못된 부분을 말씀드리고 제대로 고쳐오실 때까지 이력서를 돌려보냅니다.
그러면 또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반드시 계십니다. '저는 영한번역만 할거라 한영번역은 못해도 되지 않나요?' 정영한 선생님 가라사대 영한번역과 한영번역은 종이의 양면 같은 것이라 한 쪽에 구녕이 났는데 다른 쪽은 때워져 있을 수가 없다고요. 게다가 생각보다 내 번역을 영어로 설명해야 하는 일이 많고 이메일도 영어로 주고받습니다. 이 때 영어문장 전체에 관사가 없다, 문장을 주어 동사 목적어 갖춰 쓰지 못한다, 단복수와 고유명사 구분이 없다.... 이런 번역가들이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는 굳이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장사 잘 되는 집 중에는 손님들이 줄서서 먹기 시작하면 해이해지는 곳도 있습니다. 신선한 재료는 비싸니 적당한 재료로 대강 때우고, 넣어야 될 다시다 안 넣고(?) 그러면 단기적으로는 이득을 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손님들이 다신 찾아오지 않고 맛집이라는 소문도 안 내줄테니 장기적으로는 장사에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hopefully 1.5년 주기로 교재를 개정할 생각입니다. 교재 인쇄 들어가는 시점부터 다음 판 원고 구상함.... 이력서랑 샘플테스트 보고 남는 시간에는 번역 관련 여러 (노잼) 책을 읽습니다. 플러그인이나 기술은 제 능력 닿는 데까지 이해하고 써보고 있고요. 여튼 제가 먼저 여러 가지 번역도구들이 똥인지 된장인지 다 찍어먹어 보고 좋은 된장만 엄선해 드시기 쉽게 우렁이랑 애호박 양파 다시마 다시다 팍팍 옇어 된장찌개로 만들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올해에도 열심히 장사해 보겠어요.

Q) 번역가는 수입이 불안정하고 적지 않냐?
단기적으로 보면 그럴 수도 있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저는 오히려 한 회사에만 근무하는 회사원이 불안정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번역하는 여러 자료 중에는 회사의 매출실적이나 재무제표, 심지어는 회사청산, 폐업(....) 관련 문서도 있습니다. 제가 그래도 햇수로는 10년 동안 번역을 했는데 해를 거듭할수록 회사들이 현찰이 없어서 알짜 자산을 매각(예를 들면 도심지 상업용 부동산 등)하는 문서, 청산/폐업 관련 문서를 많이 번역하게 되었습니다. 갖고만 있어도 매달 돈 나오는 부동산도 파는데 비용 들어가는 사람을 못 짜르겠습니까? 실제로 수익 악화된 회사들은 주총에서 인력 감축하고 자동화 설비를 도입해 재무상태 개선할 거라고 주주들에게 호소하며 주식 팔지 말아달라고 합니다.
저는 성질을 이기지 못해 면접에서 광탈하고 번역가가 되었습니다. 그 시절에 호린님 책인 '프리랜서 번역가 수업'에 실린 인터뷰에 고시 끝나고 번역 하니까 공부 안 해도 돼서 좋고 돈을 많이 벌어서 좋다고 채신머리없이 썼는데 책 나온 거 보고 너무 죄송했습니다... 다른 분들 인터뷰를 저한테 보여주셨으면 눈치 좀 보면서 얌전하게 썼을 텐데...
여튼 하루이틀 단위로 보면 수입이 불안정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저만 해도 바로 전날 40만원 벌고 다음날 0원 번 것을 보셨을 테니까요. 그런데 6개월 정도로 놓고 보면 'A회사는 10단어 30단어짜리를 이틀에 한 번 꼴로 던져주다가 갑자기 만 단어를 1~2개월에 한 번씩 주곤 한다', 'B회사는 정기적으로 재미없고 하기 싫어 눈물이 날 정도지만 단가가 좋은 일을 준다', 'C회사는 게임을 3개월에 한 번씩 몇만 단어씩 던져주고 지급도 알아서 해 주지만 데드라인이 너무 짧다' 등 상수에 가까운 데이터를 얻을 수 있습니다. ABC까지만 들었지만 제가 거래하는 회사 수가 몇 개인지는 저도 모릅니다. 그 중에 몇 개쯤 망하더라도 제가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별로 없습니다. 게다가 엄청나게 큰 실수를 하지 않는 이상 오래 거래를 지속한 회사가 갑자기 저를 안 쓸 이유도 없고요.
그래도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월급이 안정적이라 생각하시면 그렇게 사시면 됩니다.

Q) 문과생이고 전문 분야가 없다. 그런데도 일이 있는가?
여러분이 파일을 열 줄 알고 연락 꼬박꼬박 받고 오역 누락만 안 내시면 번역으로 돈을 못 벌 일은 없다고 저와 한국산업번역교육 회원님들이 장담드릴 수 있습니다. 만약 번역이 쫌 부족하다... 그래도 파일 열 줄 아시면 먹고 사시는 데 지장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문과생이고 공업 화학 특허 법률 의료 따위에는 문외한인데다 패션 테러리스트고 화장은 쿠션만 찍어 발라본 적 있으며 하라는 게임은 안 하고 공부만 했다고 해도 위 조건만 갖추면 먹고 사시는 데 지장 없습니다.
예를 들어 저에게 '노령견의 슬개골탈구 수술 보조요법'에 대한 논문을 던져주면 저는 번역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피부과 병원에 걸릴 미용 필러 광고문이나 의료용 반창고 사용 및 관리방법에 대해서는, 용어집과 번역 메모리가 제공되면 번역할 수 있습니다.
사실 번역 업계에서 지식과 번역능력, 파일 열 줄 아는 능력(...)을 갖춘 사람을 찾기란 매우 어려워서 지식인들을 적당히 조합해 씁니다. 미용 필러 광고문 같은 경우 저같이 파일은 열 줄 아는 자들에게 맡겨 번역한 뒤 의료 전문가, 법률 전문가의 monolingual review를 거칩니다. 법률 전문가는 왜 튀어나오냐면 미용 필러 광고문에 법적으로 쓰지 말아야 할 표현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이 필러만 맞으면 60대 주름이 6살처럼 펴진다!'고 하면 안 되거든요.

Q) 작업 속도가 어떻게 그렇게 빠르냐?
70% 정도는 장비빨입니다. 일단 컴 사양이 좋고, 컴퓨터 보조 번역 도구(CAT툴) 중 가장 성능과 기능이 좋은 트라도스를 주로 사용합니다. 또한 트라도스 순정품(?)뿐 아니라 다양한 플러그인을 같이 활용합니다. 이 방법에 대해서는 한두 마디로 설명드릴 수도 없는데다 제 노동력은 소중하므로 돈을 받고 팔고 있습니다. 방법이 궁금하시면 한국산업번역교육(http://hantranedu.net/)에 가입하시길 바랍니다.
또한 제가 업계에서 존버하면서 단가를 높였기 때문입니다. 단가 높이는 방법에 대해서는 새 교재에 자세히 수록할 예정입니다. 지금 궁금하신 분은 회원 전용 질문게시판에 질문해 주시면 됩니다. 또한 제가 이 분야 저 분야 찍어먹어보고 제가 할 수 없는 분야를 확실히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는 게임, 카지노, 화장품 번역 속도가 빠릅니다. 그런데 자동차는 운전면허도 없어서 각부의 명칭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잘 몰라서 번역 못합니다. 저는 공부를 매우 싫어하기 때문에 기계, 화학, 의료 등의 분야를 공부하지 않고 번역하기를 포기했습니다. 제가 유튜브 라이브에서 '예를 들어 경영학과 졸업생은 재무제표를 번역할 수 있는데, 용어랑 숫자만 다닥다닥 붙어있어서 1학년 때 경영학원론을 안 졸고 들었으면 재무제표 번역이 가능하다' 따위의 예시를 들면 지금부터 경영학원론 공부할게요ㅠㅠ 같은 속 터지는 여름이만도 못한 소리를 하는 분들이 계신데 아 진짜 쫌... 성문기초영문법도 못해서 빽빽이 하면서 뭔 놈의 다른 공부예요 제발 기초문법이나 똑띠 하고 파일이나 잘 여세요......

Q) 미혼모/비혼모/싱글맘은 정말 공짜로 교육을 제공하는가?
맞습니다. 저희 한국산업번역교육은 덕을 착실히 적립하고자 노력하고 있사오니 저희의 덕 적립을 위하여 언제든지 연락해 주시길 바랍니다. 유료 회원과 같이 교재 제공, 이력서 첨삭, 샘플테스트 리뷰, 질문에 대한 답변 서비스가 제공됩니다. 또한 유료 회원은 2년 제한이 있지만 미혼모/비혼모/싱글맘 분들께는 평생 혜택이 제공됩니다. 올해에는 작업용 컴퓨터 제공 이벤트 따위도 하여 덕을 더 적립할 예정이오니 많이 문의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1월에도 어쩌다보니 번역가 일기로 만나도록 합시다.
임윤 임윤 · 2021-01-01 02:30 · 조회 825
전체 2

  • 2021-01-01 16:34

    결산, 질문과 답변 잘 읽었습니다! 한산번 11월에 가입하고 성문1회독 했는데, 분발해서 올해는 꼭 이력서 돌릴거에요 (주먹불끈..)


  • 2021-01-03 15:22

    제 얘기는 1, 2, 3번 답변에서 나오는데 마지막 답변에서 제일 가슴이 웅장해지는... 한산번 기업철학(?) 너무 좋습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