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벤트]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았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어릴 적 읽었던 모든 동화책은 항상 저렇게 결말이 났고, 번역에 막 입문할 무렵 저는 어느 정도 궤도에 접어든 번역가들은 어떻게 사는지 무척 궁금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유명한 신데렐라만 해도 귀족이 아닌 상인 집안에서 시집을 갔으니 시부모에게 구박받다 남편이랑 틀어졌을 수도 있고, 이웃나라랑 전쟁이 터져 남편이 참전했다가 죽어 버려서 과부로 살고 뭐 그런 결말이 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행복하고 평범한 결말대로 갔다면 딸, 아들 여럿 낳고 오손도손 살았을 수도 있고요.

저는 지난 이벤트에도 참여한지라, 참여 계기는 생략하겠습니다. 그저 운 좋게 (구)실미도(현재 산업번역교육)에 참여하면서 시키는대로 이것저것 하다 정신차려 보니 5년차에 접어드는 번역가가 되었습니다. 에이전시 연락 오면 제깍 제깍 받고 오역 누락 없는 번역을 보냈고(이 부분 약간 찔리는 게, 저도 사람인지라 중간에 실수해서 욕 먹은 적도 있음을 미리 밝힙니다.), 박 터지게 일이 몰려와서 4년간은 원하던 대로 일의 홍수에 파묻혀 살았습니다.

여기까지 쓰고 보면 참 이상적인 번역가의 삶이었고, 아무 오류가 없는 것 같지만 저는 시작 단추를 좀 이상하게 꿰었습니다. 패션의 ‘ㅍ’자도 모르는 상태에서 용감하게 샘플 테스트를 받아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테스트에 매달렸고 한 에이전시에 덜컥 합격해 버렸습니다. 합격했으니 이제 찬란한 꽃길만 펼쳐진 신데렐라의 눈부신 유리 구두를 신었다고 생각했는데 신어보니 죽을 때까지 춤을 추는 마감을 해야 하는 빨간 구두였습니다. (….)

아니 보통 합격해도 번역가는 몇 개월 쟁여두는 용도로 알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여기는 바로 다음날부터 쏟아지는 일더미에 정신 차릴 새도 없이 묻혀 버렸고 이후 4년간의 기억은 마감 그리고 마감 그리고 또 마감 이제 좀 쉬자 아니 근데 또 마감의 연속이었습니다. 정말 죽도록 춤을 춰야 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도 썼지만 이 모든 일은 ‘한군데’에서만 왕창 몰렸고, 번역가는 교체될 경우를 대비하여 여기저기 문어발처럼 발을 걸쳐둬야 하건만, 저는 꼬박꼬박 오는 일의 달콤함에 취해 4년 넘게 한 곳에 매달리는 미련한 짓을 하게 됩니다. 매달 월급처럼 일이 꼬박꼬박 들어왔고 저는 이 분야 배경지식이 전무하여 일하는 속도마저 엄청나게 느렸습니다. 허덕허덕 대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단가 인상을 하고 영업을 할 생각으로 단가 인상을 했는데 O.K.가 되고 일이 더 몰려와 진짜 그냥 거기에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그대로 오래오래 춤추면서 행복하게 살 줄 알았죠.

그런데 말입니다. 에이전시에서 번역가는 언제나 교체 당할 수 있는 하나의 부품이라고 임윤님이 종종 말씀하셨는데 말씀처럼 어느 날부터 일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그 사이 해이해져서 제 번역 퀄리티가 떨어졌을 수도 있고 단가 문제일 수도 있고 원인은 그냥 제 추측일 뿐입니다. 그리고 일이 그냥 바로 딱 끊겼다면 좀 더 빨리 대비책을 세웠을 건데 구멍 난 모래 주머니에서 모래 새듯이 조금씩 조금씩 일이 줄어드니 처음엔 숨구멍이 좀 트였다고 좋아하다가 아 이게 아닌데 싶을 무렵 제가 하던 프로젝트는 이미 다 넘어간 상태였습니다.

작년 9월쯤 제 상태는 요즘 트위터에서 가열차게 밀고 있는 애플 TV의 영화 ‘WeCrashed’처럼 컴퓨터 화면 보호기에 둥둥 떠다니는 물고기 마냥 ‘ICrashed’ 문구가 제 머릿속 여기저기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패닉에 빠진 저는 고치지도 않은 이력서를 들고 이메일을 뒤져 이전에 연락 왔는데 바빠서 귀찮다고 씹은 인물들을 대상으로 전 여친에게 새벽 2시에 ‘…자니?’하고 뜬금없이 문자 보내는 구남친의 입장에 빙의하여 이력서를 보냈습니다. 몇 군데 답 주는 곳이 있긴 했는데 샘플 테스트를 너무 건방지게(제대로 안 읽고 대충 했죠.) 한 대가로 가차 없이 물을 먹었습니다.

이력서가 문제인가 싶어 개발새발 뜯어 붙인 이력서를 임윤님에게 제출했고, 언제나 친절하시지만 단호한 임윤님은 1. 성문 기초 영문법 3회독 2. 컴퓨터 활용능력 2급 필기 책 2회독 3. 한산번 교재 1회독이란 처방을 내리셨습니다. 덧붙여 제가 레퍼런스 부족하다고 징징대니 트라도스 관련 자격증도 소개해 주셨습니다.(이건 임윤님 블로그에도 있으니 읽어 보세요.)

다른 과제는 다 수행했는데 트라도스 시험은 레벨 2에서 멈춘 상태입니다. 그거 따자마자 통과한 에이전시에서 일이 오기 시작했거든요. 그리고 또 조금 한가해진 지금 레벨 3을 마저 따야 하는데 발등에 불이 떨어지지 않으니(아직 들어올 돈 조금 있고, 샘플 테스트 깨작되는 상황) 도통 책에 손이 안 갑니다. 덧붙여 레벨 1,2에 비하면 레벨 3은 두께도 압도적으로 두껍습니다. 저거 언제 다 읽나요. 발등에 불 떨어지면 집어 들까요?

늘 부정적인 측면만 부풀려 보는 인간답게 경력 몇 년 차 되면 노련하게 문제없이 모든 것에 대처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상황이 닥치니, 누가 유리 멘탈 소유자 아니랄까 봐 몇 달 동안 난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어 이제 난 폭망이야 제자리에 주저앉아 꺼이꺼이 울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임윤님 지시대로 공부하고 이력서 수정을 완료하고, 영업을 하는 지금, 잘 써진 이력서트라도스 자격증의 위력을 피부로 조금 아니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일단 본격 영업은 시작하지도 않은 지금, 먼저 연락 오는 에이전시도 있고(이건 경력의 힘인 것 같습니다!), 3레벨은 아니지만 그래도 간지 있게 트라도스 intermediate라고 이력서에 써 놓으니(고백하지만 자격증은 땄는데 머리에 남은 건 거의 없어요.) 제 분야 아닌데도 이거 한 번 해볼래? 이러면서 웬 에이전시에서 샘테가 날아와서 덜컥 붙어 버렸고, 그냥 프로즈 구인 공고 뜨는 곳에만 이력서 넣고 있는데도 답장 안 씹히고(!) 한동안 샘테가 줄줄이 날아와서 조금 버거웠습니다.

혼자서 수습하라고 했으면 절대로 못했을 건데, 해야 할 일만 딱딱 짚어 주신 임윤님 덕분에 그나마 슬럼프를 빨리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요즘은 일 오는 템포가 다시 느려져서, 죽도록 춤을 춰야 마감을 해야 하는 빨간 구두를 내려주실 에이전시들을 매의 눈으로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아니 한동안 샘테에 시달려서 좀 쉬었다 할까 싶기도 해요. 물론 중간에 오는 일도 간간이 해가면서 말이죠.

당분간은 한가하면서도 조금은 불안한 시기가 되지 않을까 싶지만 문제가 생기면 언제나 질문 게시판에 달려와서 물어볼 수 있고, 프로즈에 올릴 샘플 번역까지 첨삭해 주는 한산번이 있으니 든든한 기분이 듭니다.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하고 해결해야 하는 프리랜서 특성상 가끔은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것 같은 기분에 울적해지고, 작은 일에 툭하면 멘탈이 무너지는 저 같은 사람에게 있어 늘 뒤에 있는 한산번은 힘들 때마다 기댈 수 있는 듬직한 아군 같은 존재이며,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손을 잡아주는 친정 같은 곳입니다.(정작 글 쓰는 본인은 결혼 안 했다는 게 함정)

5년차 근처 진입하면 폼 나게 잘난 척 하면서 뭔가 쓸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는 ‘여러분, 저처럼 이렇게 하면 큰일납니다’ 류의 글을 쓰고 있으니 우습기도 하고 초반에 제대로 안 한 것의 업보를 지금 호되게 치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다시 빨간 구두를 신고 죽도록 마감을 하게 되면 포럼 게시판에 생존 신고 한 편 근사하게 찌겠습니다. 모두 적게 일하고 돈 많이 버는 쾌적한 프리랜서 생활 누리시길 바랍니다.
번역가 blueundine blueundine · 2022-04-04 18:03 · 조회 856
전체 6

  • 2022-04-05 16:10

    후기 감사합니다!
    이분이 전설의 레전드인 게 저도 번역 에이전시 몇 군데 등록돼 있는지 기억도 안 납니다. 모두 지나가시면서 짜란다(짝) 짜란다(짝) 한 번씩 해드리고 지나가세요 ㅇ0ㅇ)


  • 2022-04-05 17:21

    짜란다(짝) 짜란다(짝)


  • 2022-04-06 17:34

    (옆에서 폼폼을 흔들고 있다)


  • 2022-04-05 20:22

    짜란다(짝) 짜란다(짝)


  • 2022-04-06 10:57

    짜란다(짝) 짜란다(짝)


  • 2022-04-08 18:48

    엄지 척 올리고 갑니다~~ 짜란다(짝)짜란다(짝)